잘못 찍은 도장값…노조대표자 ‘직권조인’ 불법
[노조대표자 직권조인㊤]기억을 더듬어보면, 조합원 다수가 반대함에도 임금을 삭감하는 등 개악된 단체협약에 노동조합위원장이 도장을 찍고 도망간 사건이 적지 않았다. 잠적까진 아니지만, 최근에도 위원장 권한을 남용한 ‘직권조인’으로 조합원들의 근로조건을 저하시키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노조지도부가 단체협약서에 도장을 찍을 땐, 노사합의가 조합원들의 이해·요구에 부응하는지 꼼꼼하게 살펴야만 한다. 조합원의 의사를 반영하기 위한 내부절차를 준수하지 않고, 노조위원장 독단으로 한 노사합의는 헌법상 단결권을 침해하는 불법행위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기 때문이다(대법원 2018.07.26. 선고, 2016다205908).
이번 대법원 판결에 따라 KT노동조합과 노조위원장 등 피고는 1차 소를 제기한 226명 원고에게 각각 20~3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 여기에 1100명이 넘는 원고가 제소한 2차, 3차 소송이 서울중앙지법에 계류 중이다. 대법원 판결에 따라 중앙지법에서도 원고승소 판결을 낼 것으로 보여, KT노조 등 피고가 부담해야 할 손해배상금액은 2억원가까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번 잘못 찍은 도장값으로는 적지 않은 금액이다.
규약을 위반한 노조위원장의 직권조인은 불법행위
KT노동조합은 2014년 4월 회사측과 단체협약을 통해 ▲특별명예퇴직 및 임금피크제 시행 ▲복지제도 축소 ▲전환배치에 합의했다. 노사합의 과정에 노조는 조합원 총회도 개최하지 않았고, 조합원 의견수렴 절차도 거치지 않았다. 이후 사측은 노사합의를 근거로 8300명을 퇴직시켰고, 이는 KT 사상 최대규모의 명예퇴직으로 기록됐다.
노사합의에 따라 명예퇴직한 근로자, 전환배치 합의에 따라 전보된 근로자 등 226명은 법원에 소를 제기하며, ‘2014년 4월 단체협약’은 조합원들의 의견수렴 절차를 거치지 않아 무효라고 주장했다. 단체협약 체결과정에서 조합원의 민주적 참여를 보장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16조를 위반했고, 조합원에게 조합의 문제에 동등하게 참여할 권리를 보장한 동법 제22조를 위반했으며, 총회의 의결을 통해 단체교섭을 체결하도록 정한 KT노조 규약을 위반해 무효라는 주장이다.
이와함께 원고들은 무효인 노사합의를 통해 조합원들의 근로조건이 저하돼, KT노동조합 및 위원장 등 원고들의 불법행위로 피고들이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며 손해배상도 청구했다.
이 사건 원심 판결(서울고법 2015.12.16. 선고, 2015나2026878)은 단체협약이 무효라는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원심은 “노사합의를 체결함에 있어서 피고들이 이 사건 규약 등에서 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잘못은 인정되지만, 위와 같은 내부 절차를 거치지 않은 잘못만으로 노동조합과 사용자 사이에서 체결된 단체협약의 효력 자체를 부정하는 것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들어 단체협약의 효력을 인정했다.
원심과 대법원…단체협약은 유효, 불법행위 책임은 인정
그러나 손해배상청구에 대해서는 원고들이 노사합의가 무효라고 주장하며 제시했던 이유를 모두 받아들여, 원고들의 청구를 인용했다. 대법원 역시 원심판결과 동일하게 단체협약의 효력은 인정했지만, KT노조와 위원장 등 피고들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었다.
KT노조 위원장의 직권조인 행위에 대해 대법원은 “조합원들의 의사를 결집·반영하기 위하여 마련한 내부절차를 전혀 거치지 아니한 채 조합원의 중요한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사항 등에 관하여 만연히 사용자와 단체협약을 체결하였고, 그 단체협약의 효력이 조합원들에게 미치게 되면, 이러한 행위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보호되는 조합원의 단결권 또는 노동조합의 의사 형성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침해하는 불법행위”라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또 단체협약 체결이 규약을 위반해 불법행위라는 원고들의 주장도 받아들였다. “이 사건 규약이 단체협약 체결에 관한 사항을 조합원 총회의 의결사항으로 정하고 있고, 대표자로 하여금 조합원 총회의 의결을 거친 후 단체협약을 체결하도록 정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피고 노동조합의 대표자인 피고 등이 총회의 의결을 통해 조합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전혀 거치지 않은 채, 특별명예퇴직 및 임금피크제 시행, 복지제도변경 등을 내용으로 하는 이 사건 각 노사합의를 체결한 것은, 이 사건 규약을 위반하여 노동조합의 의사 형성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조합원들의 절차적 권리를 침해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당시 KT노조 위원장 등 피고들의 불법행위를 인정한 대법원은 “불법행위로 입은 비재산적 손해에 대한 위자료 액수는 사실심 법원이 여러 사정을 참작하여 그 직권에 속하는 재량에 의하여 이를 확정할 수 있다”며, 원심이 인정한 원고 1명당 20~30만원의 위자료 금액도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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